불편한 질문 2009년 2월 25일


나는 내 빌딩의 가장자리에 둘러 싸여 있으며, 아이들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오줌을 가득 채운 콘돔을 던지기 때문에 발코니 아래를 걷는 것을 피한다.
딸을 가진 아버지가 윤활유와 물, 피가 섞인채 떨어지는 가방을 옮기고 있다. 그들은 기다리는 줄이 알려주는 할당된 물품들이 아침에 온 푸줏간에서 오는 길이다.
그 둘은 그들의 트로피 고기를 가지고 행복하게 계단을 오른다. 아내는 아마도 벌써 양파를 썰고 있을 것이고 동시에 여러날의 공백기 만에
단백질이 왔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나는 그들의 뒤에서서 작은 여자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빠, 지금까지 닭 몇마리나 먹어봤어?” 나는 1층부터 6 층까지 올라오느라 모든 땀구멍으로
땀을 흘리는 당황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내가 어떻게 알겠니? 음식은 세보지 않았어”
그러나 작은 여자아이는 졸랐다. 명백하게 그녀는 곱셈과 나눗셈을 배우고 있고 그래서 그녀는 세상을 나눠서 순수한 숫자로써 완벽하게 설명하고 싶어한다.
“아빠 만약 아빠가 53살이고 매달 푸줏간에서 1 파운드의 닭을 얻었다면, 아빠는 아빠가 몇달을 살았는지 알아야만 해. 그 나온 값을 4 파운드로 나누면
치킨이 항상 어느정도 무게가 나가는지 알 수 있어.”

나는 그녀가 설명한 수학적 공식을 따라가고 있어고 33년 동안 나는 99마리의 치킨을 먹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 남자는 나의 계산을 방해하며
그녀에게 “이쁜아, 내가 태어났을 땐 닭은 할당되지 않았어”
나는 내가 자랄때 어떻게 할당이라는 족쇄가 나의 두 발목을 붙잡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암시장 덕분에, 공기업으로 부터의 자원 전환, 전환페소만
파는 상점들, 옷들을 음식과 교환해주는 것, 그리고 수 많은 평행 트랙들, 나는 정확히 얼마나 먹었는지 알수가 없었다
내가 과거에 조급해할때 작은 피타고라스로부터 의구심이 드는 문장을 들었다
“오 아빠, 아빠는 내가 푸줏간에서 그사람들이 아빠에게 아빠가 원하는 만큼 닭을 팔았다는 것을 믿길 바래요?”

피자에 대한 향수

그것은 70년대에 배급시장의 어둠침침함을 깨기위해 강제로 오게 되었다. 날마다 밥과 콩이 계속되는 가운데, 피자는 피자의 고귀함과 색깔로 우리를 공략했다.
각 도는 피자가게를 세우고, 고유의 조리법을 개발했으며, 어떤 지중해의 요리사에게는 낙담의 원천이 되었지만, 섬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매혹적인지 모른다.
두껍고 많은 토마토소스와 바삭거리는 가장자리, 그래서 피자는 수세대 쿠바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 되었다.

그리고 90년대의 위기가 오자 지역 이탈리아 음식점들은 오직 오렌지껍질과 시가의 즙만을 팔았다. 우리는 소련연합시절의 “황금”시기 동안 보조되었던
라자냐와 스파게티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차있다. 친구들이 모일때마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피할수 없는 주제이며, 피자는 가장 큰 갈망을 일깨운다.
1994년 8월에 일어난 라프터 위기때 폭발한 배고픔과 불만의 압박은 정부로 하여금 자가경영을 승인하게 하였다.
모험심강한 식료품 조달자들로 부터 잃어버렸던 밀가루로 만들어진 물품들이 돌아왔다

많은 쿠바 노동자들은 오늘날 개인 판매자가 만드는 “길거리” 피자를 구입한다. 그들은 직장에서 주는 애처로운 점심 대신에 피자를 먹는다.
그러나 여러 달동안, 가계 기업에서 물품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암거래 시장에 대한 계속되는 습격과 허리케인으로 인한 위기의 결과가 음식 판매자를
질식시켰다. 국가 자원의 전환없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전체 판매가 가능한 시장에서 할 수없는 자가경영을 할 수 있다.
“길거리”음식이 오직 전환페소로만 팔리게 되어 사먹기 힘들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농담을 하고는 한다: 몇몇 사람들만 주장한다, 많은 조합물에
대한 염증으로 피자는 마침내 짐싸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조세 콘라도 2009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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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 같지 않은 일요일, 산티아고의 거의 섭씨 23도, 나는 성찬대로 부터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약 2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척박한 이웃인 산을 배경으로 한 나무로 된 교회에서 그의 연설을 들으러 왔다.
나에게는 성찬식이 지루했고, 나는 그가 현실로 부터 축하하고, 예수님을 오늘을 다루기 위한 언급으로 가져가는 것이
놀라웠다. 조세 콘라도는 군중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따뜻하고 친절한 산티아고 사람은 그의 신도들에게 감히 화를 내는 누군가에게도 마음을 줄 수 있다.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성가신 증거이며, 입에 재갈을 물리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미친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고무 시키고 (open letter to Raul Castro.*) 이것을 읽는, 그를 보는 것이 놀랍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이미 가진 공문서에 대한 답장을 기다리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조용한 기도자는 그의 각각의 교구자들로 부터
벗어나 변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외침과 그들의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는자 이다.
그의 작은 산타 테레시타 교회는 모든것이 말해져 있다. 거기에 있던 나는 그들에게 그것은 할수 없는, 해서는 안되는,
오래동안 기다려야 하는 항소의 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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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와이세대 팀이 영어로 변역하였고 이 사이트의 페이지에 올려 놓았다.
원본은 스페인어로 이곳(can be read here.)에서 읽을수 있다.

엔도포비아 2009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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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에 대한, 외국에 대한 거부는 차별과 모욕과 동등하게 나쁘게 보인다.
당신의 동포애에 대한 동일한 권리를 거부하는 것 과 같은 것을 배제하는 이상한 “엔도포비아”는
이 섬의 거리에서는 일상적인 것이다. 내가 받았던 Santiago de Cuba 도시의 가장 강렬한 인상중에 하나는
외국 방문객들과 같은 동일한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Cespedes 공원 코너에 위치해 있는 전화국 현대식 사무실인 ETESCA는 팩스를 보내거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직 당신이 쿠바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나 오랜세월동안 거주 하지 않고, 이 나라에서 수 백킬로
떨어진 나라에 산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때만 이용 가능하다.
나는 이 사실을 내가 이 사무실에 들어가 알수없는 표정을 하는 스태프들이 내 차림새를 보며 외국인인지 내국인인지
알아내려는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주 좁은 틈도 비집고 들어가는 데 도가 터서, 영어와 독일어를 뒤범벅으로
말해서 그들이 나에게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는 카드를 팔게 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지난 일요일 포스트를 보내고 그들이 어떻게 인터넷을 접속하는 여러 쿠바 인 들을 방해하는지 보았다.
아무 말없이 그저 간단한 “인터넷이용은 관광객만”이라는 말과 함께, 그들은 내 친구들이 방 끝쪽에 앉아 있지 못하게
하였다. 특히 화가 난 한명이 항의를 했다. 그는 “이곳은 사람을 너무 무시하는 군”라고 말했고, 나는 더 이상
가짜 독일인인척을 할 수 없었고, 정정을 해주었다.: “이곳은 존중이 없는 곳이군. 이런곳이 더 많지”
일분 후 나는 떠나라고 요청을 받았고 나는 이미 내 글을 내게 여권을 요구하지 않는 넓고 개방된 곳이 남길 수 가 있었다.

Ortega y Gasset 가 Cachita를 만나다 2009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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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부터 우리는 Santiago de Cuba에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Cobre 성당에서 돌들을 가져오라고 하셨고,
내 자매는 전통음악의 후렴구에 있는 “little Virgin of Charity”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 더 하게 되었다:
“blogger Jouney”라 불리는 바이러스를 아바나 보다 인터넷 접근 더 어렵지만 의견을 피력할 필요가 있는 이 도시에 퍼뜨리는 일.

여행은 나에게 여러 포스트에서 말해질 인상들의 혼합을 안겨다 주었다. 나는 춤추며 사교적인 사람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나는 웃음을 보지 못한채 갈 것이다. 라울 카스트로 광장은 오늘로부터 관광객들을 호객하는 사람들과 나에게
음식을 살 돈을 요구하는 걸인들과 같이 약 한달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전환페소를 교환해주는 상점들로 넘쳐나는 거리들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벼랑끝에 집들이 있는 가파른 거리를 거닐었다.
“물을 아껴드세요. 우리는 2주에 한번식 밖에 물탱크를 채우지 못해요”는 우리가 4일간 잤던 친절한 가족의 환영 인사였다.

일 아침인 오늘,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모임을 가졌다. 불만과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우리를 초대해 쿠바 블로그활동에
대해 듣고자 했다. 처음에는 수줍었지만 몇 분후 다차원적이고 유연한 도구인 블로그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Cuban Vocies 프로젝트에 참가할 것인지 봐야 한다.
나는 섬 속의 섬인 the Virgin of Charity of Cobre 성당에 있었다. 똑같은 유리 케이스에 있는 그곳은 정치범들의 자유를
제공하고 반군의 표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내가 Ortega y Gasset 상을 준 이곳은 가장 적합한 장소 였다.
다행스럽게도, 검열관의 긴 잣대가 미치지 못하는 사원. 조국의 초록 크로커다일을 볼 수 있는 Cachita 근처는
아직도 다양성의 성지라 불리는 곳 중의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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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Santiago de cuba 근처에 있는 구리 광산 마을인 El cobre는 Cobre의 성지이며 쿠바 수호신인 the virgin of Charity
별명은 “Cachita” 를 모시는 곳이다. 교회는 1800년대 초에 쿠바 해안 근처 바다에 떠있는 작은 the Virgin Mary의 상들을
가지고 있다. Cachita의 신사 방문객들은 올림픽 메달에서 생필품까지 다양한 선물들을 놔두고 간다.
이러한 선물은 정부에 의해 검열되거나 압수되지 않는다. 방문객들은 또한 광산에서 구리돌들을 가지고 간다.
독자들중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웹페이지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Cuban Voices (쿠바 목소리들)은 섬에 있는 블로그들에게 새로운 집이 되었다.

학교급식 2009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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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연합의 원조 시기에 학교 스낵으로 달콤한 것들과 함께 받았던 청량음료를 모르는 사람들. 모든 것이 공짜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청량음료를 터뜨려 거품을 뿌리고 과자를 던지며 놀던 시기에, 우리는 그것의 중요함을 간과하게 되었다.
우리의 손에 구아바 과자와 달콤한 쿠키는 Salud 거리에 있는 Soledad 코너 근처의 작은 학교 발코니로부터 날아왔었다. 이 간식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간식들이 없는 학교시간 중간에는 우리는 정오까지 배고픔에 지쳐갔다.

90년대의 경제 공황 초기에, 원조 물품 중 가장 먼저 없어진 것은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간식들이었다. 아이들은 병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쿠키를 실은 트럭이
아침일찍 오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못했다. 과자들을 던지던 추억은 수 많은 낭비에 대한 괴로움으로 다가 왔다.
부모님들은 학교를 위해 간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아야만 했고 어느 누구도 언론에서 왜 정확히 그들이 음식제공을 중단해야만 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밟게 빛나고 사라지는 별* 2009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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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는 수많은 방법들 중에서, “부재속에 빛”과 같은 아주 이상한 방법들도 있다. 어제 Granma 페이지에 쿠바기에 삼각형 모양의 중간에 다섯개의 하얀 별이 있는
자리에 도저히 놓칠수 없는 빛이 사진속에 남아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 신무이 벌써 다팔리고 모두들 이 이야기를 하면서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했다.
명백하게, 이것은 별이 쉽게 없어질수 없기 때문에 프린트상의 오류로 볼 수 없다

나는 변덕스럽고 거만한 밝은 별이 우리의 자주성을 나타내며 마가렛 대처의 생일 전날에 사라지기로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발산하는 독립의 기운은
외부권력의 자연스러운 독립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강력한 국가의 자주민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손조차도 전혀 보지 못하는 시민 자유의 영역에서 이는 참으로 참담하고, 굳건한 별은 붉은 들을 돌보지 않고 당의 공식적 기관을 떠나
신문 일면에 부재의 상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수백번의 성공들보다 상징적으로 더 무게감이 있는 실수들이 있다. 잘 볼수가 없는 별들과 자신의 도주를 설명하는 독자들.
섬은 예언들과 미신들에 의존해 살고, 국가 영웅을 기리는 날들과 수 많은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을 감히 보여준 국기.

* 조세 마트의 글중에서, 원작의 대사는: 밝게 비추고 살해하는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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